2010년 5월 13일 목요일

[X-Files] 조연열전 #2 - 스키너 부국장

FBI Assistant Director Walter Skinner

Mitch Pileggi라는 배우가 연기한 FBI의 부국장 Walter Skinner는 시리즈 시작부터 맨 마지막 편까지 나오는 아주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스키너에 대해 말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엑스파일의 첫번째 에피소드는 에피소드 1이 아니다(스타워즈 같구만). 폭스 TV에서 시리즈의 성공에 불안했는지 파일럿 에피소드를 내보냈고, 생뚱 맞게도 이 에피소드에는 79라는 번호가 매겨져 있다. 스키너는 이 파일럿 에피소드에도 출연한다.

멀더와 스컬리, 엑스파일에 협조적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등장인물을 나눈다면 분명 스키너 부국장은 좋은 편에 속하지만,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스키너 부국장은 멀더의 직속 상관으로 엑스파일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말이 감독이지 사실은 감시 임무이다. 스키너가 처음 등장하는 것도 스컬리에게 멀더를 밀착 감시하라고 고위층들의 지령을 내리는 장면부터이다.

그림자 집단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공식적인 계통을 밟지 않고서도 FBI를 통제하고 있었다. 스컬리에게 지령을 내리는 사람들 사이에 "담배 피는 남자"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스키너 부국장은 그림자 집단의 일원은 아니었지만 역시 집단의 통제를 받는 존재였다.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힌 걸까. 단순히 그림자 집단이 막강한 권력을 가져서? 상부의 압력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이 힘 앞에 얼마나 쉽게 굴복하는지 경험해 본 적이 있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뭐 성적인 약점을 잡혔을 수도 있지^^.

"Why FBI?"라는 글에서 후버와 FBI의 특기가 남의 약점을 잡아채서 협박하는 거라는 걸 말한 적이 있다. 스캔들을 약점으로 잡는 건 FBI만은 아닌데, 박통 시절에 YS도 비슷한 문제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는 썰이 있다. 믿거나 말거나 말이다. "Why FBI?"에도 썼지만 마틴 루터 킹 목사도 FBI에 섹스 스캔들 약점을 잡혀 있었다. 스캔들이야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 중의 최고는 섹스 스캔들이라.

칼 맑스 같은 사람마저도 섹스 스캔들이 있었다. 맑스는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의 사이에 7명의 자식을 낳았지만 그 중 넷은 어려서 죽었다. 예니는 아이들을 묻을 관을 구하느라 미친 듯이 헤맸다고 한다. 항문이 파열될 정도로 가난했지만 맑스네는 하녀를 두고 있었다. 예니의 집안은 상당한 명문가였는데, 처녀 적부터 데리고 있던 하녀를 결혼하면서도 데리고 왔고, 이 하녀는 생활고에도 맑스네를 떠나지 않았다. 문제는 말이지, 맑스가 이 하녀 헬레네 데무트하고 일을 저질러서 프리드리히라는 아들을 덥썩 낳아버린 것이다. 대체 예니처럼 예쁘고 지적인 마누라를 둔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바람을 핀 걸까. 그것도 한 집안 식구하고 말이다. 하여간 남자라는 동물은... 맑스의 평생 친구 엥겔스는 맑스네를 먹여살려준 것도 모자라 이 아이를 데려다 자식처럼 키웠다고 한다.

세계적 구라꾼 움베르트 에코는 소설 "푸코의 진자"에서 주인공 까소봉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마르크스와 예니의 성생활은 순조로웠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의 부드러운 산문을 읽으면서 특유의 유머 감각을 접해 보면 누구든 이것을 느낄 수 있다. (중략) 줄창 끄루프스까야(레닌의 마누라) 같은 여자에게 시달리다 보면 누구든 "유물론과 경험비판론"같이 시시한 책 밖에는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움베르토 에코, "푸코의 진자" 1권, 열린책들, 2000년 3월 15일 개역판 13쇄 91페이지

맑스 가족의 단란한 한 때(1864년 런던).
뒷줄 왼쪽에 Marx, 오른쪽에는 절친한 친구 Engels
아래는 Marx의 세 딸, 왼쪽부터 Laura, Eleanor, and Jenny

3번째 시즌 21번째 에피소드 "악령의 화신(원제 Avatar)"에서 이혼을 앞둔 스키너 부국장은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찐한 베드신을 연출한다. 근데 깨어보니 여자는 죽어 있고, 스키너는 섹스스캔들만이 아니라 살인 혐의까지 뒤집어 쓰고 만다. 멀더와 스컬리를 감싸고도는 스키너를 제거하기 위한 함정에 빠진 것이다. 멀더와 스컬리의 활약으로 누명은 벗었지만 망신은 망신이다. 스키너의 베드신은 엑스파일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야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스키너는 머리가 벗겨지긴 했지만 중년이라는 나이에도 상당히 탄탄한 몸매를 가지고 있으니 노친네의 베드신이라고 민망하지는 않았다. 멀더의 몸매보다도 스키너 몸매가 더 나은 듯.

에피소드 "악령의 화신"
One night stand를 한 미모의 여성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놀하는 스키너 부국장

베트남전에 참여해서 전우들이 모두 죽고 혼자 부상을 당한 채 살아남는 경험을 했던 스키너는, 음모와 협잡의 밀림에서 살아남기 위해 악전고투한다. 처음에는 그림자 집단의 힘에 마지못해 협력하기도 했지만, 멀더와 스컬리의 직속 상관으로서 엑스파일과 부하를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영어식으로 하자면 자기 엉덩이를 가리기 위해 애를 쓴다. 몰래 정보를 빼돌려 멀더를 도와주기도 하지만, 멀더와 스컬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그림자 집단과 타협을 해야 했다. 그림자 집단이 보낸 자객의 총을 맞기도 하고(3시즌 15번째 에피소드 "위험한 거래" : 원제 Piper Maru) 몸 속에 심어 놓은 나노로봇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기고(6시즌 10번째 에피소드 "최후의 24시간" : 원제 S.R.819) 그후에도 목숨을 건지기 위해 마지못해 협박에 응해야 할 때도 있었다. 배은망덕한 멀더와 스컬리는 이런 스키너를 몰라 주고 의심하고 총을 겨누기까지 한다(3시즌 2번째 에피소드 "밝혀진 음모" : 원제 Paper Clip). 이상한 약물을 먹고 신경 과민이 된 멀더로부터 주먹질을 당한 적도 있었다(2시즌 에피소드 25 사막의 증언, 원제 Anasazi). 권투로 다져진 체력으로 멀더를 밀어붙이긴 하지만 말이다.

에피소드 "사막의 증언"
멀더의 주먹이 스키너의 얼굴에 작렬 !!

하지만 곧 이렇게 형세 역전

권력과 음모에 맞짱을 뜨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책임 있는 FBI 부국장으로서 멀더의 황당한 주장에 맞장구 치기도 어렵다. 자신과 부하 직원을 지키면서 그렇다고 권력 앞에 그냥 무릎 꿇기도 어려운 스키너의 신세는, 안전 그물 없이 뉴욕 쌍둥이 빌딩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광대마냥 위험스러운 것이다. 자기 고뇌를 의논할 상대도 없다. "악령의 화신"이라는 에피소드에서 이제 스키너의 전처가 될 여자는 남편은 자기 속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고 혼자서만 끙끙 앓는 꽉 막힌 사림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멀더와 스컬리는 스키너의 도움을 그렇게 받고 서로 아밀라제를 상대방 안면에 분수처럼 퍼부어댔으면서도 정작 스키너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아는 게 없다는 걸 깨닫는다(결혼했다는 것도 모른다 -_-a;;). 스키너란 인물은 이런 사람이다. 그야말로 갈등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2010년 5월 12일 수요일

[X-Files] 조연열전 #1 - 외로운총잡이(들)

"옛날에 세 명의 얼간이가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영웅처럼 보이지만 한 번도 진짜 영웅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죽음의 위기도 여러 번 넘겼고, 그러는 동안 FBI요원을 알게 되었으며, 그와 그의 파트너를 돕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애국심으로 나라를 사랑했고, 악의 세력들을 찾아내기 위해 끝없이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 험한 세상에서는, 이들처럼 이상만을 쫓고,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싸우며, 그 싸움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항상 이길 수 있는건 아니었습니다."
-- 9번째 시즌 15번째 에피소드 "인간 시한 폭탄(원제 Jump the Shark)"에서. (http://prozac.pe.kr/xfiles/ 에서 빌려왔습니다.)

엑스파일 시리즈에 나오는 조연들 중에 항상 세 사람이 몰려다니는 무리가 있으니, 이름하여 The Lone Gunman, 외로운 총잡이들이다. 이 총잡이 삼인조(실제로 총을 잘 쏠지는 몹시 의심스럽다)는 UFO와 정부의 음모를 추적하여 폭로하는 것을 삶의 의의로 삼고 있는 해커 집단이다. 또 외로운 총잡이는 이 세 사람이 발행하는 신문의 이름이기도 하다. 외로운 총잡이는 첫번째 시즌 16번째 에피소드 "UFO의 정체(원제 E.B.E)"에서 처음 출연했다. (E.B.E는 Extra Biological Existence 외계생명체의 약자가 아닐까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외로운 총잡이들은 멀더를 능가하는 꼴통들이요, 편집증에 사로잡힌 음모이론가들이다. 로즈웰 사건을 비롯해서 미국 정부는 외계인 사건을 은폐하고 있고, 케네디는 군산복합체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정부는 빅브라더라는 걸 코털끝만치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 얘네들은 사담 후세인과 모니카 르윈스키가 인조인간이라고 자기네 신문에 기사로 떠벌리기까지 한다. 멀더는 그래도 잘 생겼고 FBI 특수요원이고 학벌도 좋지만 얘들은 대체 뭘 믿고 요따위로 노는걸까? 비디오도 영 안 받쳐주는데 말이다. 인물지상주의적이고 학벌지상주의적인 논평이라고 욕해도 할 수 없다-_-;;... 이 총잡이들의 면면을 살펴보자.

정부의 음모를 폭로하는 신문 "The Lone Gunman"의 머릿기사, "텔레토비는 세뇌도구"

먼저, Frohike. 프로하이크라고 읽어야 할 지, 프로히키라고 읽어야 할 지 헷갈리는데 뭐 프로히키라고 읽자. 좀더 촌스러우니깐. 나이를 어느 정도 다량 섭취하신 것 같은 비디오를 가지고 있다. 키는 난장이 똥자루요 머리는 벗겨졌고 삼인방 중에 제일 늙어 보인다. 면도도 잘 안한다. 대다수 여자들이 싫어하는 요소는 참 골고루도 재고로 보유하신 분이다. 원래 컴퓨터 해커 출신이고 스컬리를 사모한다. 삼인방 중에 제일 정이 깊은데, 멀더가 죽자(죽었다고 알려지자) 혼자 술에 취해 술병을 들고 울면서 스컬리를 찾아간다. 기회를 노려 스컬리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고도의 작전이었는지도 모르지만.

다음 Langly. 원어 발음이야 랭리에 가깝겠지만 랭글리라고 하는게 발음이 편하다. 키가 크고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역시 해커 출신이다. 이 선수도 연세가 어찌 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연세가격을 다하지 못한다는 건 마찬가진데, 꼴 사납게 머리를 길게 기르고 록 뮤지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다닌다. 20세기 말과 21세기 초반을 오가는 드라마 속에서 아직도 6,70년대 히피 문화에 포옥 빠져 살고 있으니 시대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우드스탁 록 페스티발의 부활이라도 꿈꾸는 걸까. 늘 프로히키에게 자기가 더 뛰어난 해커라는 걸 인정하라고 윽박지른다.

마지막 멤버는 John Fitzgerald Byers. 1963년 11월 22일 생으로 이 선수의 생년월일만이 삼인방 중에서 정확히 알려져 있다. 왜냐면,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날 태어났다고 이름을 그렇게 붙였기 때문.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늘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수염도 깨끗하게 손질하고 다닌다. 원래는 연방통신위원회 FCC의 홍보요원이었다. 해커를 단속해야 할 연방통신위원회의 공무원께서 어쩌다가 해커들과 어울리게 된 것일까. 여자 때문이다...

왼쪽에서부터 프로히키, 랭글리, 바이어스

삼인조가 결성된 사연은 5번째 시즌 첫번째 에피소드 "음모 속의 여인(원제 Unusual Suspect. 우리나라 방송분에서는 첫번째 에피소드는 아니었다)"에 나온다. 때는 1989년, 바야흐로 PC의 시대가 개막되던 그 즈음, 한 정보통신 관련 전시회가 발단이 되었다. 프로히키나 랭글리는 케이블 TV 유료 채널을 공짜로 보게 해주는 요상한 장치(당연히 불법이고 뻑하면 불이 난다) 같은 걸 들고 전시회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고, 바이어스는 전시회장에서 캠페인 버튼을 나눠주는 시시한 일을 하고 있었다. 이런 그들에게 왠 묘령의 여인(사실 하나도 안 예쁘고 상당히 겉늙어 보인다. 참 눈도 낮다) 수잔이 도움을 요청하고 미인계에 빠진 그들은 감히 국방부의 극비 통신망에 침투한다. 수잔은 FBI 요원의 추적을 받고 있었는데, 욘석이 바로 당시에는 신참이었던 멀더.

세 남자를 하수구에 빠뜨린 수잔.
고작 이 정도 여자 땜에 인생을 망치다니...

수잔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삼인조를 물귀신처럼 궁지에 끌어넣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거짓말에 삼인방은 이 여자를 슬슬 의심하는데, 수잔은 추적장치가 심어져 있다면서 손수 생이빨을 뽑는 퍼포먼스까지 연출하신다. 근데 진짜로 이빨에 전선 나부랑이가 연결되어 있다. 헷갈리던 차에 수잔이 검은 승용차로 납치되는 걸 보고서 삼인방은 여자의 말을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 바이어스는 아예 사랑에 빠져 버린다.

역시 여자란 요물이다. 은나라를 멸망시킨 새디스트 달기, 주나라를 멸망시킨 웃지 않는 미녀 포사, 오나라를 멸망시킨 가냘픈 서시, 당 현종을 눈 멀게 한 양귀비, 알렉산더 대왕을 부추겨 페르세폴리스에 불을 지르게 한 창녀 타이스,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오간 클레오파트라. 남자의 신세를 조져버린 많은 여자들. 나도 신세 조져도 좋으니 이런 미인과 사랑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 김윤아나 심은하 같은 여자하고(*^o^*)... (제가 솔로 부대 고참 부대원이었던 시절에 쓴 걸 옮기다보니 이런 대목이 남아 있습니다. 현재의 저나 김윤아씨, 심은하씨는 모두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있으며 스캔들에 휩싸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m__m)

알고보니 수잔은 극비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던 과학자였고, 정부의 음모를 폭로하려다 쫓기게 된, 80년대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도바리를 치게 된, 운동권이었다. 삼인방과 멀더는 수잔의 뒤를 쫓던 "그림자 집단" 행동대원들(이 행동대원들의 리더가 X이다)과 충돌하고 멀더는 생화학 무기에 중독되어 외계인이 나타났다고 헛소리를 해댄다. 해커라는 집단이야 원래 편집증 증세가 심한 분들이고, 멀더는 타고난 또라이라는게 여기서 증명되어 버렸다. 삼인방과 멀더, 아주 천생연분이다.

수잔은 나중에 6번째 시즌 19번째 에피소드 "음모 속의 여인, 10년 후(원제 Three of a Kind)"에 다시 한 번 나오는데 그때까지도 바이어스는 그녀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총잡이들은 CIA든 국방성이든 NSA(National Security Agency 국가안전국. CIA보다 더 많은 예산을 사용하는 통신감청 기관이다)든 마음대로 해킹을 해서 멀더에게 정보를 주고, 심각하고 무겁게 나가기 쉬운 극의 분위기에 코믹한 요소를 가미하는 감초 같은 존재다. 외로운 총잡이가 엑스파일 매니아들에게 꽤나 인기가 있었던 모양인지, 외전처럼 독자적인 드라마 시리즈로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Jump the Shark. Jump the shark란 TV쇼나 가수, 배우들이 최고로 물이 올랐다가(?) 이 시점을 기점으로 잊혀지거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전환점을 의미하는 신조어란다. 우리말로 하면 '한물 가다'쯤 된다고 할까?(http://prozac.pe.kr/xfiles/ 에서 빌려온 이야깁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엑스파일은 7번째 시즌에서 끝냈어야 한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 쓸데없이 질질 끌며 질을 떨어뜨리는 건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8시즌부터는 멀더도 잘 등장하지 않고 스토리도 갈팡질팡하기 시작한다. 엑스파일도 Jump the Shark, 한물 가기 시작한 것이다. 엑스파일 제작자들의 망가져 가는 시리즈에 대한 자의식을 반영한 것이 9번째 시즌 15번째 에피소드의 "Jump the Shark"이다. KBS에서 붙인 제목은 "인간 시한 폭탄". 엑스파일 제작자들, 이런 자의식을 발동한 끝에, 아예, 숫제, 총잡이들을 단체로 죽여버린다!

우리의 외로운 총잡이들도 음모의 추적자로 현역으로 뛰기엔 너무 나이를 먹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나이 먹도록 한 일이 고작 쓰레기 같은 신문을 만든 것 밖에 없고, 빈털털이 신세가 돼서 컴퓨터까지 모조리 빼앗긴다. 마지막 임무로, 세상의 종말을 앞당기려는 종말론자들의 생화학 테러를 저지하기 위해 총잡이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지들이 무슨 터미네이터인 줄 아나). 그 공로로 한평생 정부의 음모를 파헤치던 총잡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앨링턴 국립묘지에 묻힌다.

"옛날에 세 명의 얼간이가 있었습니다. 얼핏 보면 영웅처럼 보이지만 한 번도 진짜 영웅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죽음의 위기도 여러 번 넘겼고, 그러는 동안 FBI요원을 알게 되었으며, 그와 그의 파트너를 돕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애국심으로 나라를 사랑했고, 악의 세력들을 찾아내기 위해 끝없이 싸웠습니다. 그러나 이 험한 세상에서는, 이들처럼 이상만을 쫓고, 올바른 일을 위해서만 싸우며, 그 싸움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항상 이길 수 있는건 아니었습니다."

총잡이들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나오는 나레이션이다. 멀더는 또라이, 외로운 총잡이들은 얼간이. 역시 천생연분이다.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그렌다이져의 주제가가 옳은 것만은 아니다...

[책이야기] 존 에드가 후버의 전기

예전에 고려원이라는 출판사가 있었다. 한 때는 꽤 많은 베스트셀러를 내기도 했는데 지금은 부도가 나 사라졌다. 그래서 고려원의 책들은 일반 서점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지하철 역 같은 곳에 있는 할인 전문 서점(주로 부도가 난 출판사의 책을 취급하는) 같은 곳엘 가야 구할 수 있다. 절판된 책이나 시중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책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가끔 이런 서점엘 가는데, 몇 년 전 동대문 운동장 역에 있는 서점에서 "조작된 신화, 존 에드가 후버"라는 책을 샀다.

후버에 대해서는 이미 "[X-Files] Why FBI?"에서 장황하게 써 놓아서 더 할 말이 없다. FBI의 창립자이자, 수사기관으로서의 FBI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었으며, 동시에 남의 약점을 바탕으로 무려 8명의 대통령이 자리를 바꾸는 동안에도 권력을 휘두른 인간. 동성애를 국가를 좀 먹는 병이라고 범죄로 취급하면서도 그 자신이 동성애자였던 희한한 사람. 아마 튜링이 미국 사람이었다면, 그의 고국에서보다 더 큰 고초를 치렀을 것이다. (튜링에 대해서는 "[책이야기] 크립토노미콘"을 참고하세요)


이 전기의 저자는 앤터니 서머스, 출판사는 고려원, 출판연도는 1995년, 원제 "Official and Confidential : The Secret Life of John Edgar Hoover". 그런데 번역자의 말이 재밌다. 좀 길지만 그 중 일부분을 인용해 보겠다.

"(...) 이 책을 번역하며 (...) 후버와 비슷한 길을 가던 본인으로서는 후버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 또한 지울 수 없었다. 후버라고 왜 평범하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이 없었겠는가.
때때로 권력자들은 체제의 수호를 담보로 국민들에게 일정한 의무를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서 암암리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영달을 위해 사용된다면 이는 명백한 권력 남용이다. (...) 나는 일찍이 역사 앞에서 발가벗겨질 수 밖에 없는 권력과 권력자의 비애를 숱하게 보아왔다.
(...) 내가 권력과 안보 논리를 등에 업고 해 온 일에 대해 나는 나름의 정당성을 갖고 있었지만, 내가 한 일에 대한 회한과 반성이 없을 수 없었으며, 이 평가 또한 내 몫이 아니라 역사의 몫이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권력은 붕괴하며, 절대적 권력은 절대적으로 붕괴한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정 / 형 / 근 !! 정형근 아자씨, 웃겼어요. 해내셨어요. 원츄 ~~.

[X-Files] Why FBI?

멀더와 스컬리는 FBI 요원이지만, FBI는 그들에게 몹시 적대적이다. 동료들은 멀더와 스컬리를 비웃고, FBI 고위층은 멀더와 스컬리를 엿먹일 궁리만 한다. 비록 멀더와 스컬리가 FBI 수사관으로 음모를 뒤쫓지만, FBI는 그들을 훼방놓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음모의 주요 축 중의 하나이다.

엑스파일이 음모이론에 대한 드라마라고 한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왜 FBI를 무대로 했을까? 음모이론에 대한 드라마라면 차라리 CIA를 무대로 하는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CIA는 KGB와 더불어 스파이 조직의 대명사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스파이의 이름은 제임스 본드이지만, 제임스 본드가 소속된 영국 정보부가 SIS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반면 CIA나 KGB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내 특기인 샛길로 빠져들기 신공을 다시 한 번 펼쳐보자. 영국의 정보 조직에는 영국 국내에서 외국의 첩보 활동을 저지하는 MI-5, 해외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공작을 벌이는 SIS가 있다. 그 밖에 통신 감청이나 위성을 통한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조직도 있다. MI-5든 SIS든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를 체포하거나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몫이다. 우리나라처럼 안기부(지금은 국가정보원이지만 아직도 안기부나 중정이라는 이름이 훨씬 정이 간다^^)가 국내외 활동을 모두 장악하고 경찰권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는 예전 소련의 KGB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미국도 미국내 방첩 업무는 FBI 소관이고, CIA의 미국내 활동은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다.

이들 정보기관은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국 국가안전기획부의 모토)"하는 스릴 만점의 첩보 조직이라는 이미지도 있지만, 더러운 일을 밥 먹듯 저지른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만만치 않다. CIA만 놓고 보자면,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킨다며 피그스만 침공 작전을 일으켰고, 베트남전 당시에 온갖 지저분한 공작 작전을 펼쳤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맘에 안드는 나라의 정치인들을 암살하거나 쿠데타를 사주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닉슨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에도 전직 CIA 요원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1970년대 미국 상원의 청문회에서는 CIA가 인체실험도 자행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케네디 암살에도 CIA가 개입했다는 주장이 있으니 CIA는 그야말로 온갖 음모이론의 두엄더미인 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CIA와는 달리 FBI의 이미지는 프로페셔널한 수사기관이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FBI의 과학 수사는 "살인의 추억" 식의 엉성한 한국 경찰과 비교하여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SWAT(Special Weapons and Attack Team : 특수기동대)나 HRT(인질구조대)의 활약상을 그린 박진감 넘치는 영화도 많다.

그런데 왜 하필 CIA가 아니라 FBI가 음모이론 드라마의 무대인가. 일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FBI가 첩보 조직이기도 하다는 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FBI의 추문은 대부분 창설자인 후버 국장과 관련되어 있다. 엑스파일의 주무대는 FBI이고 워싱턴에 있는 FBI 본부건물이 맨날 나온다. 드라마 자막에는 그냥 "Washington FBI Headquater"라고 나오지만, 이 건물의 다른 이름은 "후버 빌딩"이다. 전설적인 FBI 후버 국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후버는 요원을 엄격하게 선정하여 훈련시키는 방법을 제도화했다. 그는 지문을 정리하여 보존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FBI는 얼마 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범죄자들의 지문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과학적인 범죄수사연구소를 설립하고, FBI 국립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이 학교에서는 미국 전역에서 엄선된 법률 집행관들이 특수훈련을 받았다(자료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후버는 29살에 법무부 산하의 수사국 국장이 되어 연방수사국으로 확대 개편시켰고 1972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을 국장 자리를 지켰다.

오늘날의 FBI를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후버 국장이었다. 살아 생전에 후버 국장은 FBI 그 자체였고 교황이었다. 무려 8명의 대통령이 자리를 바꾸는 동안에도 자리를 지켰다.

이런 반면, 후버는 지독한 인종주의자에 여성차별주의자였고 매카시즘의 신봉자였다. 1930년대 이후 마피아나 알 카포네가 암흑가를 주름 잡았지만, 후버는 조직 범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군인,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도청을 하고 사생활을 감시하여 파일로 만들어 협박을 일삼았다. 후버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든 후버의 협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후버가 쥐고 있는 파일 때문에 감히 후버를 FBI 국장 자리에서 몰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설적인 FBI 국장 존 에드가 후버.
참 비주얼이 건전치 못하게 생겼다.

후버가 죽자 가장 문제가 된 것이 "후버 파일"의 행방이었다. 측근들이 파일을 소각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부는 발견되었고 또 일부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과연 이 파일을 누가 차지했냐를 놓고 또 음모론이 난무했다.

"후버 파일"은 스릴러 소설이나 할리우드 영화가 즐겨 찾는 소재이기도 하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숀 코넬리가 주연한 "The Rock"에서 숀 코넬리는 전직 영국 첩보부 요원으로 나온다. 우리의 케서방, 이번에는 FBI 폭발물 전문가가 되어 알카트라스 감옥에서 오랜동안 갇혀 있었던 숀 코넬리의 도움을 받는다.

영화 "더 록"

도대체 왜 전직 영국 첩보부 요원이 미국 감옥에서 장기수 노릇을 했던 걸까. 숀 코넬리는 바로 후버 파일을 훔쳐냈던 것이다. 체포 당시 그는 파일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 행방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숀 코넬리는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파일을 촬영한 마이크로 필름의 위치를 가르쳐준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필름을 찾아내 도망치면서 애인에게 케네디 암살이 누구 소행인지 알아냈다고 환호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CIA의 모토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라틴어로 된 성경 구절이다(신촌에 자리잡은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어느 대학의 모토도 CIA와 같다. 이 대학의 한국어학당에서 CIA 요원들이 한국어를 배운다는 썰이 있다.). FBI의 모토는 "Fidelity, Bravery, and Integrity"이지만, 후버의 모토는 "정보는 나의 힘"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추문은 나의 힘"인가?

후버는 FBI의 정치적 독립성을 이뤘다는 찬양을 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독립성은 음모와 협박으로 만들어낸 또다른 권력이었을 뿐이다. 인종주의자에 남녀차별주의자에 메카시스트에 음모가에 별 타이틀을 다 내걸었다. 외부적으로 후버는 또 지독한 동성애 혐오론자이기도 했다. 동성애는 위대한 미국의 정신을 갉아먹는 더러운 병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후버는 동성애자였다.-_-a;;

후버는 한 번도 결혼을 한 적이 없었다. 독신이라는 이유로 동성애자라는 건 아니다. 후버가 자기 심복과 동성애 관계였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후버가 마피아나 조직 범죄 소탕에 소극적이었던 건 마피아가 후버의 동성애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다. 걸핏하면 남의 성생활을 염탐하여 협박을 하던 후버가 정작 마피아에게 성생활을 약점으로 잡혔던 것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고(구약), 재떨이로 흥한 놈 재떨이에 망하는 법(넘버 3)이다. 약점을 잡혔던 아니던, 동성애자였던 아니던, 후버가 조직 범죄 단속에 몹시 소극적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마피아 두목들과 절친하게 지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FBI 요원들로부터는 교황과 같은 존경을 받았지만, 정치인, 언론인, 흑인민권운동가나 좌파, 자유주의자, 반전운동가들에게 후버는 악마의 사도, 반지의 제왕이었다. 후버가 가장 증오한 사람들 명단에 말콤 엑스나 마틴 루터 킹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킹 목사는 은밀한 성생활 때문에 후버에게 약점을 잡혀 고민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FBI의 사찰 대상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비교적 진보적인 인물이었고 매카시가 주도한 "반미국적 행위에 대한 의회 조사위원회(HUAC :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협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비타협적인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 "말콤 X"

이 후버라는 사람, 정말 연구 대상이다. 얘도 외계인이 아닐까? 후버에 대해서는 "[책이야기] 존 에드가 후버의 전기"를 참고하세요.

FBI도 CIA에 못지 않게 음모이론이라는 똥파리들을 불러모으는 거름더미라는 게 이번 글의 요지이다. 엑스파일이 음모이론에 대한 드라마이면서도 CIA가 아니라 FBI를 무대로 한 것도 과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후버 파일"이나 FBI의 음모와 사찰과 협박 같은 어두운 면을 제대로 다루지 않은 건 정말 이상한 노릇이다.

딱 한 번 엑스파일에 매카시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시즌 5의 15번째 에피소드 "회색분자(원제 Travelers)"에서 1950년대에 처음으로 엑스파일 사건을 수사했던 아서 데일이라는 요원의 경험담이 나오는데, 아서 데일은 철저한 매카시주의자인 고위층으로부터 한 공무원을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이 공무원은 전쟁 중에 미국 정부로부터 생체 실험을 받아 괴물이 된 희생양이었다. 공산주의 운운했던 것도 정부의 비밀 생체 실험을 은폐하려는 수작이었다. 이 불쌍한 인간을 몰래 풀어준 사람은 젊은 날의 빌 멀더, 폭스 멀더의 아버지였다.


추신:
금주법 시대의 유명한 갱 두목 알 카포네는 세금포탈 혐의로 체포되어 위에서 "더 록"의 배경으로 언급한 알카트라스 형무소에 수감 중 매독(!)으로 죽었다.

추신의 추신:
알 카포네가 마피아 두목이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알 카포네는 마피아가 아니었다. 알 카포네가 이탈리아계 갱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당시만 해도 가부장적인 카톨릭 색체가 짙었던 마피아는 마약이나 매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마약과 매춘은 알 카포네의 주종목이었다.

2010년 5월 11일 화요일

[책이야기] 크립토노미콘

미국과 영국이 이차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건 암호전에서 일본과 독일을 앞질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독일과 일본의 암호는 미국과 영국에 의해 완벽하게 해독되었다. 흔히 최초의 컴퓨터는 탄도계산을 위해 개발된 Eniac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전에 암호 해독용 컴퓨터가 먼저 개발되었다고 한다. Colossus라는 이름의 이 컴퓨터는 비밀로 분류되어 아직까지도 자세한 사항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Wikipedia에 실린 Colossus의 이미지


이차대전 때 독일군은 에니그마라는 암호 장비를 이용했는데, Colossus는 에니그마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한 컴퓨터였던 것. Colossus의 개발을 주도한 것이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Turing이다. Turing은 이차대전 때 암호 해독 업무에 종사했다.

소설 "크립토노미콘"은 현재(혹은 근미래)와 이차대전을 오가며 암호와 일본이 숨겨놓은 금괴 탐색을 그린 꽤나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이차대전 때 정보전에 뛰어든 워터하우스와 현대의 해커인 그의 손자 워터하우스가 주인공이다. 소설 속에서 할아버지 워터하우스는 이차대전 직전 프린스턴 대학에서 튜링과 친구가 되고, 당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천재들이었다.

암호는 "모순"이다. 적군의 암호를 깨고, 또 적군이 깰 수 없는 암호를 개발하는 "모순"이다.

적의 암호를 깼다고 해서 그 정보를 사용하면 암호가 깨졌다는 정보를 적에게 주게 되고 적은 또 암호를 바꾸게 될 테니 암호 해독은 무용지물이 된다. 그렇다고 정보를 사용하지 않으면 기껏 암호를 해독한 의미가 없다. "모순"이다.

또 깨기 어려운 암호일 수록 실전에서 사용하기 어려우니 그 또한 "모순"이다. 오죽하면 미국은 이차대전에서 나바호 부족을 암호병으로 채용했을까. 나바호 족 암호병의 이야기는 "엑스파일은 인종주의" 편을 참고하세요~~~

출판사는 책세상, 저자는 닐 스티븐슨으로 사이버펑크 계열의 SF 작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닐 아저씨의 다른 사이버 펑크 소설보다 이게 훨씬 재밌다. 닐 아저씨는 튜링에게 무슨 성적 호기심 같은 거라도 있는지, 다른 소설에서도 거듭 튜링을 언급한다. 혹시 닐 아저씨는 동성애자?

Alan Mathison Turing은 영국의 수학자로, 이차대전 중 추축국(독일-일본-이탈리아)의 암호를 해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튜링 머신이라는 이론상의 자동 계산 기계를 고안하여 단순한 계산기와는 다른, 프로그래밍이 가능한 현대의 디지털 컴퓨터의 기초를 놓았고, 더 나아가 컴퓨터에 무작위 요소를 도입하여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유사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이론을 정립해서 인공지능 연구의 기초를 세우기도 했다. 이렇게 놀라운 사람이? 혹시 튜링도 외계인?

하지만, 소설에도 나오지만, 현실에서의 튜링도 동성애자였다. 나치는 유태인만이 아니라 동성애자들도 가스실로 보냈는데, 정도는 달랐을지언정 당시 유럽과 미국, 소련, 체제와 국경을 막론하고 동성애는 일종의 정신병이거나 범죄 행위로 간주되었다. 전쟁 중에는 튜링의 놀라운 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 튜링을 기다리는 건 "치료"를 위한 감옥행 티켓이었다. 전쟁 중의 공로와 천재성을 높이 산 영국 정부가 튜링을 국립호텔로 모시기로 한 것이다. 튜링은 결국 청산가리를 넣은 사과를 먹고 자살했다. 현대의 백설공주는 계모가 준 독사과가 아니라 자진해서 독사과를 먹었고, 어느 왕자도 키스로 튜링을 되살려주지 않았다...

디지털 컴퓨터의 아버지 Alan Mathison Turing.
천재라기보다는 노이로제에 걸린 회사원 같다.

[X-Files] 엑스파일은 인종주의?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탈리아계가 마피아의 전형인 것처럼, 흑인들이 하층 범죄자나 운동 선수의 전형인 것처럼, 히스패닉 역시 하층 범죄자 인간 쓰레기나 아니면 하녀 등으로 종종 그려지는 것처럼, 아일랜드 계의 전형적인 느낌은 경찰이다.

실제로 FBI를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만든 존 에드거 후버가 FBI 요원의 모범으로 삼은 것이 바로 단정한 옷차림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아일랜드 계였다고 한다. 스컬리는 후버가 원하던 FBI 요원의 기준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여자라는 점만 빼면. 후버는 여자를, 캐리어우먼을, 페미니즘을 혐오했다고 한다.

멀더 역을 맡은 데이빗 듀코브니가 유태계라는 건 앞에서 이미 말했는데, 유태계의 이미지가 산업 금융 분야나 학자, 사상가라는 점에서 볼 때, 멀더와 스컬리는 미국의 전형적인 미국의 인종주의적 선입관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고 한다면 해석의 과잉일까?

실제로 전체 엑스파일 시리즈를 통틀어 봐도 유색인종이나 라틴계 백인이 주요 인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개별 에피소드에는 간혹 나오는 경우가 있지만 별로 긍정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아주 예외적으로 6번째 시즌 20번째 에피소드 "인간이 된 외계인(원제 The Unnatural)"에 천재적인 흑인 야구 선수가 나오긴 한다. 멀더는 50년 전 신문에서 외계인 암살자의 사진을 발견하고 당시 로스웰 경찰관으로 일했던 사람을 찾아가 흑인 야구 선수와 KKK단, 외계인 암살자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데, 알고보니 그 흑인 야구선수마저도 사실은 외계인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개인적으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의 하나이다. 야구와 유머가 너무 좋아 인간이 되길 바랬던, 그래서 동족의 품위를 저버렸다고 외계인 암살자에게 처형을 당하고, 결국 붉은 피를 흘리며 인간으로 죽어가는 외계인 야구선수가 나오는 따뜻한 내용이다. 이 에피소드에 나오는 흑인 소울풍의 "Come and Go with Me to that Land" 라는 노래도 참 좋은데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다. 누가 이 음악이나 이 가수의 mp3 파일 가지고 있으면 연락주세요.

에피소드 "인간이 된 외계인"
이 넘의 정체는 겉모습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변신 외계인

악당이든 좋은 놈이든 시리즈에 지속적으로 자주 출연하는 인물들 중에 유색인종은 나바호 부족 인디언인 앨버트와 그림자 집단에서 내부 정보를 유출하는 X, 멀더를 잡어먹지 못해 안달하는 커쉬 국장 정도 뿐이다. X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할테고, 앨버트는 2번째 시즌의 마지막인 25번째 에피소드 "사막의 증언(원제 Anasazi)"부터 시작하여 3번째 시즌 초반과 나중에도 가끔 출연한다. 뭔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인자하고 지혜로운 나바호 부족 할배 앨버트는 멀더의 목숨을 구해주고 극비 문서를 해독해준다.

에피소드 "사막의 증언"
신비로운 나바호족 할배 앨버트

인디언 할배가 암호를? 앨버트는 이차대전 중 미국 육군의 암호병이었던 것. 요즘이야 무선 통신을 암호화하니 도청이 쉽지 않지만, 이차대전 때만 해도 그런 기술은 없었다. 총알이 날아다니는 와중에 무전기로 어느 세월에 암호 시스템을 운영하느냐고. 해서 미국이 들고 나온 것이 나바호 부족을 무전병으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무전을 도청해도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차대전 때의 정보전 이야기는 "[책이야기] 크립토노미콘 편"을 참고하세요.

니콜라스 케이지가 출연한 "윈드 토커"라는 영화에서 바로 이 나바호 족 암호병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의 케서방은 나바호 족 암호병들을 보호하는 동시에, 만약에 적군의 포로가 될 것 같으면 처형하는 임무도 맡고 있다.

영화 "윈드 토커"의 포스터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엑스파일은 권력과 국가의 추악한 음모를 쫓는다는 점에서 얼핏 진보적인 드라마처럼 보인다. 시즌 7의 18번째 에피소드 "헐리우드로 간 엑스파일(원제 Hollywood A.D.)"에는 60년대 히피 문화의 지도자였다는 인물이 나오는데 멀더는 그 사람이 어릴 적 자기 우상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멀더는, 말하자면 자유주의자다. 미국에서 자유주의자라는 말은 좌파와 종종 동의어로 쓰인다고 한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면면을 보면 엑스파일은 지독한 인종주의적인 드라마인지도 모른다...

[X-Files] About Scully #4

스컬리는 외롭다.

스컬리의 가족 관계에서 이미 짐작이 가는 거지만, 스컬리는 아마 범생이었을 거다. 아무 것도 모르고 교과서만 파는 쑥맥은 아니었다 해도. 엑스파일과 멀더를 만나기 전만 해도 곁눈질하지 않고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살아왔다. 쓸데없이 권위적인 가부장제가 아니라, 보수주의의 이상인 온건한 가족주의 밑에서 성장한 것이다.

스컬리의 어릴 적 별명은 Starbuck, "모비 딕"에 나오는 항해사의 이름이다. 아버지는 스컬리를 Starbuck이라고 부르고 스컬리는 해군 장교인 아버지를 Ahab(모비 딕에 나오는 선장)이라고 부른다. 정다운 부녀 분위기가 팍팍 풍기지 않는가. 스컬리는 이렇게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랐다.

이런 범생이들이라고 가족주의에 염증을 느끼지 않을까. 아무리 가족의 품이 따뜻해도 사람은 성장하면서 가족은 굴레가 된다. 스컬리는 권위와 힘이 있는 남자를 동경하면서도 또 그 관계를 벗어나고파 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들은 대개 그녀보다 나이가 많고 성공한 아빠나 오빠 같은 남자들이었다. 의대 시절에는 교수와 연애에 빠졌고(7번째 시즌 17번째 에피소드 "과거의 그림자", 원제 "All Things"), FBI에서도 나이 많은 요원과 사귄 적이 있다(첫번째 시즌 14번째 에피소드 "두 영혼을 가진 사나이", 원제 "Lazarus"-성경에 나오는 나자로)고 극중에 나온다.

에피소드 "과거의 그림자".
스컬리는 죽음을 앞둔 스승이자 옛 연인을 만난다. 하필 이런 늙은이와...

멀더는 스컬리가 이전에 사랑했던 남자들과는 다르지만, 어쨌거나 그 방면에서는 능력이 탁월하고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이다. 스컬리가 멀더에 대한 감정을 놓고 갈팡질팡하는 건 힘과 권위에 빠져드는 자연스런 감정과, 스컬리의 성장 배경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멀더의 스타일 때문이다. "헐리우드에 간 엑스파일"에서 영화 속 스컬리가 스키너 부국장을 사랑한다고 말해 멀더를 열받게 하지만(멀더 이야기 5편을 참고하세요), 사실 그간의 스컬리의 연애담으로 봐선 스키너 부국장이 더 취향에 맞기는 하다.

날씨가 화창한 주말이나 명절 때만 되면 스컬리는 왜 내가 이렇게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지하실에서 요상한 사건 파일이나 뒤지고 시체나 쑤석거리며 인생을 보내고 있나 한탄하곤 한다. 범생이고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으면서 좀만 시간이 지나면 일탈을 벌이는 그녀의 고질병이 고개를 스멀스멀 들기 시작한다. 자, 이제 저지르는 일만 남았다.

시리즈 중에 스컬리는 몇 번 이 일탈을 실행에 옮긴다. 근데 그 대상들이 좀 그렇다. 6번째 시즌 18번째 에피소드 "불타는 심장 (원제 : Milagro)"과 4번째 시즌 13번째 에피소드 "붉은 문신 (원제 : Never Again)" 등등 적극적이고 정열적으로 대쉬하는 남자들과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항상 좋지 못했다. 목숨을 잃을 뻔하다가 멀더에게 구출되곤 하는 것이다.

에피소드 "불타는 심장".
스컬리의 공식, 사고치면 죽을 뻔 한다.

스컬리는 외롭다. 잘 생기고 지적이고 헌신적이긴 하지만 무드라곤 통 모르는 곰팡이 같은 멀더 말고 나를 뜨겁게 달궈줄 그런 남자 어디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