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파일이 음모이론에 대한 드라마라고 한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왜 FBI를 무대로 했을까? 음모이론에 대한 드라마라면 차라리 CIA를 무대로 하는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CIA는 KGB와 더불어 스파이 조직의 대명사다.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스파이의 이름은 제임스 본드이지만, 제임스 본드가 소속된 영국 정보부가 SIS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반면 CIA나 KGB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내 특기인 샛길로 빠져들기 신공을 다시 한 번 펼쳐보자. 영국의 정보 조직에는 영국 국내에서 외국의 첩보 활동을 저지하는 MI-5, 해외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공작을 벌이는 SIS가 있다. 그 밖에 통신 감청이나 위성을 통한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조직도 있다. MI-5든 SIS든 사법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를 체포하거나 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경찰의 몫이다. 우리나라처럼 안기부(지금은 국가정보원이지만 아직도 안기부나 중정이라는 이름이 훨씬 정이 간다^^)가 국내외 활동을 모두 장악하고 경찰권까지 가지고 있는 경우는 예전 소련의 KGB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드문 일이다. 미국도 미국내 방첩 업무는 FBI 소관이고, CIA의 미국내 활동은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다.
이들 정보기관은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국 국가안전기획부의 모토)"하는 스릴 만점의 첩보 조직이라는 이미지도 있지만, 더러운 일을 밥 먹듯 저지른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만만치 않다. CIA만 놓고 보자면,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을 붕괴시킨다며 피그스만 침공 작전을 일으켰고, 베트남전 당시에 온갖 지저분한 공작 작전을 펼쳤다는 건 비밀도 아니다. 맘에 안드는 나라의 정치인들을 암살하거나 쿠데타를 사주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닉슨 대통령을 하야시킨 워터게이트 사건에도 전직 CIA 요원들이 관여하고 있었다. 1970년대 미국 상원의 청문회에서는 CIA가 인체실험도 자행했다는 증언도 있었다. 케네디 암살에도 CIA가 개입했다는 주장이 있으니 CIA는 그야말로 온갖 음모이론의 두엄더미인 셈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CIA와는 달리 FBI의 이미지는 프로페셔널한 수사기관이라는 긍정적 이미지가 강하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FBI의 과학 수사는 "살인의 추억" 식의 엉성한 한국 경찰과 비교하여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SWAT(Special Weapons and Attack Team : 특수기동대)나 HRT(인질구조대)의 활약상을 그린 박진감 넘치는 영화도 많다.
그런데 왜 하필 CIA가 아니라 FBI가 음모이론 드라마의 무대인가. 일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FBI가 첩보 조직이기도 하다는 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FBI의 추문은 대부분 창설자인 후버 국장과 관련되어 있다. 엑스파일의 주무대는 FBI이고 워싱턴에 있는 FBI 본부건물이 맨날 나온다. 드라마 자막에는 그냥 "Washington FBI Headquater"라고 나오지만, 이 건물의 다른 이름은 "후버 빌딩"이다. 전설적인 FBI 후버 국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후버는 요원을 엄격하게 선정하여 훈련시키는 방법을 제도화했다. 그는 지문을 정리하여 보존하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FBI는 얼마 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범죄자들의 지문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과학적인 범죄수사연구소를 설립하고, FBI 국립 아카데미를 창설했다. 이 학교에서는 미국 전역에서 엄선된 법률 집행관들이 특수훈련을 받았다(자료 출처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후버는 29살에 법무부 산하의 수사국 국장이 되어 연방수사국으로 확대 개편시켰고 1972년 죽을 때까지 50년 가까운 세월을 국장 자리를 지켰다.
오늘날의 FBI를 만들어 낸 사람이 바로 후버 국장이었다. 살아 생전에 후버 국장은 FBI 그 자체였고 교황이었다. 무려 8명의 대통령이 자리를 바꾸는 동안에도 자리를 지켰다.
이런 반면, 후버는 지독한 인종주의자에 여성차별주의자였고 매카시즘의 신봉자였다. 1930년대 이후 마피아나 알 카포네가 암흑가를 주름 잡았지만, 후버는 조직 범죄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군인,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 일반 시민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대로 도청을 하고 사생활을 감시하여 파일로 만들어 협박을 일삼았다. 후버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든 후버의 협력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후버가 쥐고 있는 파일 때문에 감히 후버를 FBI 국장 자리에서 몰아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설적인 FBI 국장 존 에드가 후버.
참 비주얼이 건전치 못하게 생겼다.
후버가 죽자 가장 문제가 된 것이 "후버 파일"의 행방이었다. 측근들이 파일을 소각했다고 주장했지만, 일부는 발견되었고 또 일부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과연 이 파일을 누가 차지했냐를 놓고 또 음모론이 난무했다.
"후버 파일"은 스릴러 소설이나 할리우드 영화가 즐겨 찾는 소재이기도 하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숀 코넬리가 주연한 "The Rock"에서 숀 코넬리는 전직 영국 첩보부 요원으로 나온다. 우리의 케서방, 이번에는 FBI 폭발물 전문가가 되어 알카트라스 감옥에서 오랜동안 갇혀 있었던 숀 코넬리의 도움을 받는다.
영화 "더 록"
도대체 왜 전직 영국 첩보부 요원이 미국 감옥에서 장기수 노릇을 했던 걸까. 숀 코넬리는 바로 후버 파일을 훔쳐냈던 것이다. 체포 당시 그는 파일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그 행방에 대해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 숀 코넬리는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파일을 촬영한 마이크로 필름의 위치를 가르쳐준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필름을 찾아내 도망치면서 애인에게 케네디 암살이 누구 소행인지 알아냈다고 환호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CIA의 모토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라틴어로 된 성경 구절이다(신촌에 자리잡은 독수리를 상징으로 하는 어느 대학의 모토도 CIA와 같다. 이 대학의 한국어학당에서 CIA 요원들이 한국어를 배운다는 썰이 있다.). FBI의 모토는 "Fidelity, Bravery, and Integrity"이지만, 후버의 모토는 "정보는 나의 힘"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추문은 나의 힘"인가?
후버는 FBI의 정치적 독립성을 이뤘다는 찬양을 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독립성은 음모와 협박으로 만들어낸 또다른 권력이었을 뿐이다. 인종주의자에 남녀차별주의자에 메카시스트에 음모가에 별 타이틀을 다 내걸었다. 외부적으로 후버는 또 지독한 동성애 혐오론자이기도 했다. 동성애는 위대한 미국의 정신을 갉아먹는 더러운 병이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후버는 동성애자였다.-_-a;;
후버는 한 번도 결혼을 한 적이 없었다. 독신이라는 이유로 동성애자라는 건 아니다. 후버가 자기 심복과 동성애 관계였다는 것 역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후버가 마피아나 조직 범죄 소탕에 소극적이었던 건 마피아가 후버의 동성애 장면을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상당히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다. 걸핏하면 남의 성생활을 염탐하여 협박을 하던 후버가 정작 마피아에게 성생활을 약점으로 잡혔던 것이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고(구약), 재떨이로 흥한 놈 재떨이에 망하는 법(넘버 3)이다. 약점을 잡혔던 아니던, 동성애자였던 아니던, 후버가 조직 범죄 단속에 몹시 소극적이었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마피아 두목들과 절친하게 지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FBI 요원들로부터는 교황과 같은 존경을 받았지만, 정치인, 언론인, 흑인민권운동가나 좌파, 자유주의자, 반전운동가들에게 후버는 악마의 사도, 반지의 제왕이었다. 후버가 가장 증오한 사람들 명단에 말콤 엑스나 마틴 루터 킹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킹 목사는 은밀한 성생활 때문에 후버에게 약점을 잡혀 고민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도 FBI의 사찰 대상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비교적 진보적인 인물이었고 매카시가 주도한 "반미국적 행위에 대한 의회 조사위원회(HUAC : House Un-American Activities Committee)"에 협조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비타협적인 흑인해방운동의 지도자 "말콤 X"
이 후버라는 사람, 정말 연구 대상이다. 얘도 외계인이 아닐까? 후버에 대해서는 "[책이야기] 존 에드가 후버의 전기"를 참고하세요.
FBI도 CIA에 못지 않게 음모이론이라는 똥파리들을 불러모으는 거름더미라는 게 이번 글의 요지이다. 엑스파일이 음모이론에 대한 드라마이면서도 CIA가 아니라 FBI를 무대로 한 것도 과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후버 파일"이나 FBI의 음모와 사찰과 협박 같은 어두운 면을 제대로 다루지 않은 건 정말 이상한 노릇이다.
딱 한 번 엑스파일에 매카시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시즌 5의 15번째 에피소드 "회색분자(원제 Travelers)"에서 1950년대에 처음으로 엑스파일 사건을 수사했던 아서 데일이라는 요원의 경험담이 나오는데, 아서 데일은 철저한 매카시주의자인 고위층으로부터 한 공무원을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체포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러나 이 공무원은 전쟁 중에 미국 정부로부터 생체 실험을 받아 괴물이 된 희생양이었다. 공산주의 운운했던 것도 정부의 비밀 생체 실험을 은폐하려는 수작이었다. 이 불쌍한 인간을 몰래 풀어준 사람은 젊은 날의 빌 멀더, 폭스 멀더의 아버지였다.
추신:
금주법 시대의 유명한 갱 두목 알 카포네는 세금포탈 혐의로 체포되어 위에서 "더 록"의 배경으로 언급한 알카트라스 형무소에 수감 중 매독(!)으로 죽었다.
추신의 추신:
알 카포네가 마피아 두목이었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알 카포네는 마피아가 아니었다. 알 카포네가 이탈리아계 갱이었던 건 사실이지만, 당시만 해도 가부장적인 카톨릭 색체가 짙었던 마피아는 마약이나 매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마약과 매춘은 알 카포네의 주종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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